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3부 (문단 편집) ==== 숙조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78820, #94a73e 20%, #94a73e 80%, #778820)" '''{{{#gold 조선 제19대 왕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b22222 '''대한 제3대 황후[br]{{{+1 □□皇后}}} □□황후'''}}}}}} || || '''[[존호|{{{#b22222 존호}}}]]''' ||진성□□(□□□□) || || '''[[시호|{{{#b22222 시호}}}]]''' ||□□(□□) || ||<|2> '''{{{#b22222 출생}}}''' ||[[1636년]](선조 10년, 건원 5년) || ||대한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 [[음봉면|일동면]] 삼거리[* 작중 묘사 없음. 충무대왕 이순신 생가 추정.] || ||<|2> '''{{{#b22222 사망}}}''' ||[[1708년]] [[12월 24일]] {{{-2 (음력 11월 17일)}}} || ||대한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 || '''[[능묘|{{{#b22222 능묘}}}]]''' ||정릉(□陵) || || '''[[절일|{{{#b22222 절일}}}]]''' ||□□절(□□節) || ||<|8> '''{{{#b22222 재위}}}''' || '''{{{#gold 대한 황태자비}}}''' || || ?? ~ [[1650년]] || || '''{{{#b22222 대한 황후}}}''' || || [[1650년]] ~ [[1678년]] || || '''{{{#ffd400 대한 황태후}}}''' || || [[1678년]] ~ [[1699년]] [[3월 27일]][br]{{{-2 (음력 1678년 ~ 1699년 2월 26일)}}} || || '''{{{#ffd400 대한 태황태후}}}''' || || [[1699년]] [[3월 27일]] ~ [[1708년]] [[12월 24일]][br]{{{-2 (음력 1699년 2월 26일 ~ 1708년 11월 17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3px" || '''[[본관|{{{#b22222 본관}}}]]''' ||[[덕수 이씨|덕수]](德水) || || '''{{{#b22222 부모}}}''' ||□□후 이□□, □□후부인 □씨 || || '''{{{#b22222 부군}}}''' ||열조 연가제 || || '''{{{#b22222 자녀}}}''' ||4남 3녀 ||}}}}}}}}} || * '''진성황태후 → 진성태황태후 이씨''' 열조의 황후이자 건복제와 성친왕의 모후.[* 재석은 2부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꿈을 꿔서 울면서 상희에게 토로할 정도로 '나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며 어머니의 부재를 슬퍼했는데 3부에서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순신의 장남 이회의 손녀. 1636년생. 막내 성친왕을 귀여워하며 오냐오냐 키웠는데, 정도가 너무 지나쳐 성친왕이 양녕대군 수준의 패악을 부리는 데다 성친왕과 반대로 엄하게 자란 건복제에게 성친왕이 밉보여서 결과적으로 성친왕이 견서사로 국외추방당하는 원인을 간접적으로 제공한다.[* 나가서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로 건복제가 성친왕을 견서사로 추방할 때 개입하지 않는 대신 성친왕의 측근인 이형준과 정호찬을 겨우 견서사에 동행시킨다.] 재석이 동변관리사가 된 후 사망한 강씨를 대신할 새 친왕비로 미색과 총명함을 겸비한 것으로 유명한 민지영(3부 상희)를 새 성친왕비로 간택해 미주로 보내준다. 무인지변 당시 건복제가 의식불명에 빠져 혼란한 상황에서 황실 큰어른으로서 상황을 정리하며 반란 진압에도 일조한다. 숙조가 붕어한 후 재석이 원역사의 조선에서 영조가 형인 경종의 왕세제로 즉위하면서 했던 것[* 경종비로 영조의 형수인 선의왕후를 왕대비로, 숙종비로 영조의 계모인 인원왕후를 대왕대비로]을 떠올려 칭호를 태황태후로 높인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하자 이전과 태도가 달라졌는데, 제왕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어서 숙조를 엄격하게 대하고 성친왕은 오냐오냐 하면서 키워서 상술한 사단이 났는데도 재석이 태황이 되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과거 숙조를 대했던대로 재석을 대한다.]][* 그렇지만 평소와 같이 대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본인도 어떤게 맞는지 번민하고 있는 듯 하다.] 이후 태후와 합세해서 재석에게 3명의 후궁을 들이게 한다. 황태후로서의 정치적 입장보다는 두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성애 강한 어머니이다. 3부 들어서 막 나가는 경향이 생긴 재석 때문에 마음고생을 자주 한다. 원각사와 회엄사를 자주 방문했다는 것을 보면 불교도인 듯 하다. 디에고가 대한에 찾아왔을 때는 분노해서 매우 질책하긴 했지만, 황실의 핏줄을 버릴순 없다며 종친으로 살게 해줄 것을 권한다. 이후 디에고를 만났을 땐 누가 봐도 성친왕의 아들인데다가 예의바른 태도와 성실함에 만족해한다. 재석 또한 빙의를 시작한 후 50여년만에 처음으로 얻은 '친어머니'인데다 상희를 정실 아내로 맺어주는 등 태후에게 고마움이 많아 태후가 노환으로 병석에 눕자 상희가 말리지 않았으면 내의원을 뒤집어버렸을 것이라고 묘사되는 등 태후를 친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지극정성으로 효를 다한다. 계미남변이 끝난 후 1708년 12월 24일 향년 73세에 노환으로 붕어한다. 붕어 직전에도 문병을 와 슬퍼하는 재석에게 태황이 아랫것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안된다고 꾸짖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강단있는 모습을 보인다. * '''정현장공주, 정선장공주''' 열조와 진성태황태후 이씨의 딸들로 건복제와 성친왕의 동복 누나들. 어머니, 올케와는 친하지만 동복동생인 남동생들과는 딱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라고 한다. 두 사람의 남편들은 족친위인데 예왕의 반란 때 탈출해 성친왕에게 가담했으며, 심양회맹에도 건흥제와 함께 참석한다. 올케인 황태후와 조카인 영선공주와 같이 놀며 지낸다. 1732년 이전에 둘 모두 노환과 병으로 훙서한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700 조선 제17대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b22222 '''대한 제3대 태황'''[br]{{{+1 '''숙조 건복제 | 肅祖 建福帝'''}}}}}}}}} || ||<-3> {{{#c19c22 '''숙조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태황[br]{{{-2 肅祖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太皇}}}'''}}}[*B 원 역사 숙종과 동일.] || || '''[[묘호|{{{#b22222 묘호}}}]]''' ||'''[[숙조]](肅祖)''' || || '''[[존호|{{{#b22222 존호}}}]]''' ||현의광륜예성영렬[br](顯義光倫睿聖英烈)[*B][* 작중에서는 숙종의 시호를 존호로 언급하므로 숙종이 가장 처음 받은 존호 표기.] || || '''[[시호|{{{#b22222 시호}}}]]''' ||장문헌무경명원효태황[br](章文憲武敬明元孝太皇)[*B][* 작중에서는 숙종의 시호를 존호로 언급하는데, 오류로 추정.] || ||<|2> '''{{{#b22222 출생}}}''' ||[[1659년]] || ||대한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C 작중 묘사 없음. 추정.] || ||<|2> '''{{{#b22222 즉위}}}''' ||[[1678년]] || ||대한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C] || ||<|2> '''{{{#b22222 사망}}}''' ||[[1699년]] [[3월 27일]] {{{-2 (음력 2월 26일)}}} || ||대한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 '''[[능묘|{{{#b22222 능묘}}}]]''' ||태릉(泰陵) || || '''[[절일|{{{#b22222 절일}}}]]''' ||□□절(□□節) || ||<|6> '''{{{#b22222 재위}}}''' || '''{{{#ffd400 대한 황태자}}}''' || || ?? ~ [[1678년]] || || '''{{{#b22222 대한 태황 대리청정}}}''' || || ?? ~ [[1678년]][* 연가제 사망 전 6개월.] || || '''{{{#b22222 대한 태황}}}''' || || [[1678년]] ~ [[1699년]] [[3월 27일]][br]{{{-2 (음력 1678년 ~ 1699년 2월 26일)}}} || || '''[[연호|{{{#b22222 연호}}}]]''' ||건복(建福)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b22222 본관}}}''' ||[[전주 이씨|전주]](全州) || || '''{{{#b22222 휘}}}''' ||윤(阭) || || '''[[혼전|{{{#b22222 전호}}}]]''' ||선정전(宣政殿) || || '''{{{#b22222 부모}}}''' ||부황 열조, 모후 진성황후 || || '''{{{#b22222 부인}}}''' ||순현황후, 귀비 박씨, 진빈 홍씨, 미인 백씨 ||}}}}}}}}} || * '''숙조 건복제 이윤''' 3부 초반 대한의 태황이자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 이현의 동복형. 1659~1699. 연호인 건복은 [[신라]] [[진평왕]]이 사용한 연호다. 정치적, 외교적 감각도 좋고 결단력도 있는 등 훌륭한 통치력에, 경연을 벌이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할 정도로 학식도 뛰어나고 대한 밖의 세상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명군]]. 독자들의 평가는 ''''몸 약한 [[태종(조선)|태종]]''''. 현대인처럼 하늘의 뜻 따위를 믿지 않고 현실적 손익만을 따져 행동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친동생을 어린 나이에 국외 추방하는 등 냉혹해보이는 면모도 있었으나 원래는 정 많은 성격으로, 태자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하거나 순진무구한 이은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는 등 인간미도 보이기도 한다.[* 조정 대신들을 앞에 두고 순진무구한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서 재석은 망신을 당한 셈이지만, 건복제는 제위를 염두에 두고 자식들을 키운 예왕과 달리 성친왕은 그런 고려 따위 없이 순수하게 아버지로서 이은을 키운 것으로 보여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타고난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은데 [[흡연자]]이기까지 해서 재위 내내 골골댔으며, 결국 만 40세의 이른 나이에 붕어한다. 재석 빙의 2년 전 동생 성친왕이 자신과 달리 모후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온갖 패악을 부리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성친왕을 견서사라는 명목으로 영구추방했다. 그러나 재석이 빙의한 후 성친왕이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이자 성친왕을 어느 정도 용서하여 동변관리사라는 벼슬도 내리고 저택도 지어주는 등 나름 대우를 해줬고, 태자 이원이 사망하며 후계 구도가 불안해지자 귀국을 허가한다. 이후 한양대화재로 큰 피해가 발생하자 [[화병]]으로 쓰러지고, 한양대화재에서 성친왕이 진압과 인명 구조를 잘 이끄는 것을 보고 가태제로 임명하며 [[대리청정]]을 명한다. 이후 무인지변 발생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화병으로 혼절하지만 하루만에 정신을 차리고 예왕을 역적으로 선포하여 무인지변 진압을 도운 뒤, 성친왕을 공식적으로 황태제로 책봉하고 군권, 인사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넘겨준다. 무인지변을 수습하고 예왕이 사사된 이후 심리적 충격 때문에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재석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자리만 보전하다가 1699년 3월 27일 붕어한다. 죽기 6일 전 재석에게서 '[[명군이 되어보세!|미래인이 천녀에게 소원을 빌고 무종, 장조, 성친왕에게 차례로 빙의했다]]'는 사실상의 고백을 들었지만 동생의 재담이라 생각해 웃어넘긴다. 재석 입장에서는 어차피 건복제는 믿지 않을 것이고, 설사 믿는다 해도 오늘내일하고 있었기에 건복제가 이 이야기를 퍼트려도 주변에서는 헛소리를 한다고 여길 것이라는 계산까지 하고 혹시나 싶어서 상희 얘기는 빼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건복제가 금위사 보고와 성친왕의 편지를 통해 처음으로 성친왕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무종대왕의 전설'을 떠올린 것을 보면, 정말 믿고 자신 이후의 군주들 가운데 설령 암군이 즉위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장조 때처럼 재석이 빙의해 나라를 구원할 것이니 안심하고 편히 갔을 수도 있다. 저승의 상황을 다룬 외전에 따르면 어차피 [[사후세계]]를 믿지도 않았고 재석의 말도 정말로 농담으로 생각했다가 죽어서 저승에서 깨어난 후에야 재석의 말이 다 사실이었음을 알고 크게 놀랐지만,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재석이 강림하여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든든해한다고 한다. 묘호는 을병대기근을 이겨낸 공으로 숙'''조'''를 받는다. * '''귀비 박씨''' 건복제의 후궁. * '''○○옹주 이○○''' 건복제의 서녀. 1695년 [[출산 중 사망]]. * '''진빈 홍씨''' 건복제의 후궁. 자식으로 의현옹주가 있다. * '''미인 백씨''' 건복제의 후궁. 자식은 없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78820, #94a73e 20%, #94a73e 80%, #778820)" '''{{{#gold 조선 제20대 왕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b22222 '''대한 제4대 황후[br]{{{+1 □□皇后}}} □□황후'''}}}}}} || || '''[[존호|{{{#b22222 존호}}}]]''' ||순현□□(□□□□) || ||<|2> '''{{{#b22222 출생}}}''' ||[[1657년]](연가 7년) [[10월 8일]]{{{-2 (음력 9월 2일)}}} || ||대한 □□[* 작중 묘사 없음.] || ||<|2> '''{{{#b22222 사망}}}''' ||[[1746년]] [[날짜 미상]] {{{-2 (음력 월 일)}}} || ||대한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 '''[[절일|{{{#b22222 절일}}}]]''' ||□□절(□□節) || ||<|8> '''{{{#b22222 재위}}}''' || '''{{{#gold 대한 황태자비}}}''' || || ?? ~ [[1678년]] || || '''{{{#b22222 대한 황후}}}''' || || [[1678년]] ~ [[1699년]] [[3월 27일]][br]{{{-2 (음력 1678년 ~ 1699년 2월 26일)}}} || || '''{{{#ffd400 대한 황태후}}}''' || || [[1699년]] [[3월 27일]] ~ [[1740년]] [[3월 8일]][br]{{{-2 (음력 1699년 2월 26일 ~ 1740년 2월 10일)}}} || || '''{{{#ffd400 대한 태황태후}}}''' || || [[1740년]] [[3월 8일]] ~ [[1746년]] [br]{{{-2 (음력 1740년 2월 10일) ~ 1746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3px" || '''[[본관|{{{#b22222 본관}}}]]''' ||□□(□□) || || '''{{{#b22222 부모}}}''' ||□□후 양□□, □□후부인 □씨 || || '''{{{#b22222 부군}}}''' ||숙조 건복제 || || '''{{{#b22222 자녀}}}''' ||2남 1녀 ||}}}}}}}}} || * '''순현황후 → 순현황태후 양씨''' 건복제의 황후. 1657년생. 건복제보다 2살 연상. 태자, 경친왕, 영선공주를 낳았다. 친정은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선황 연가제가 외척을 경계한데다 본인의 성품과 미모가 뛰어나 간택된다. 남편 건복제의 차가운 성격에도 큰 갈등 없이 원만한 가족관계를 유지한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하면서 원역사에서 인종-명종, 경종-영조 형제 계승 때의 조선 사례를 떠올리고 황태후로 격을 높인다. 남편 건복제와 두 친아들인 태자와 경친왕을 모두 먼저 떠나보내는 큰 아픔을 겪는다. 태황태후 이씨와 고부관계가 매우 돈독한데, 건복제가 살아있을 때 냉혹한 성격을 못마땅해한 이씨와 양씨가 [[뒷담화]]를 나누면서 사이가 돈독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건복제 사후에도 변하지 않아서, 재석이 즉위한 후에도 황실의 큰어른이자 조언자로 대부분 같은 목소리를 낸다. 1708년 겨울 시어머니인 진성태황태후가 붕어하자 황실 최고 어른으로 등극하고, 계속 창덕궁에서 지낸다. 올렝카와 상희를 먼저 보내고 80살이 넘어서도 정정하게 잘 지내고 있다. 1735년에는 하나뿐인 며느리인 효장태자비 허씨와 딸 영선공주도[* 그래도 딸이 낳은 외손주가 2명 있다.] 먼저 보내고 홀로 남는다. 자식을 모두 앞세우는 아픔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온화하고 정정하다. 1736년에는 사도태자 이은의 죽음을 겪은 건흥제를 위로한다. 1740년 시동생 건흥제까지 승하하자 크게 애통해한다. 이후 황실의 중심을 잡아 갑작스럽게 즉위한 이영을 뒤에서 받쳐주다가 1746년 향년 90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 '''경친왕 이천''' 건복제의 차남. 1679년생. 아버지와 형을 닮아 병약했고 1685년 마진(홍역)에 걸려 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 '''길주공''' 강녕공의 차남. 1696년생. 5촌 당숙 경친왕의 봉사손으로 입적된다. * '''영선공주''' 건복제와 황후 양씨 사이의 외동딸. 1677년생. 사실 [[고명딸]]인데 오빠와 남동생이 모두 요절해서 외동딸이 되었다. 혼인을 하고 자식도 낳았다는 것을 보면, 태황의 약한 체질을 물려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건복제의 딸 셋 중 유일한 적통이라 건복제의 적통 후손은 모두 영선공주의 자식들[* 영선공주 소생 외손 2명]이 되었다. 남편은 예왕의 반란 때 성친왕의 편을 들고 탈출했으며, 그 후 심양회맹에도 참석했다. 양력 1712년 5월 30일에는 모후와 고모인 장공주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는 등 소소하게 놀며 지낸다. 1732년 어머니인 순현태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 '''반남위 박진훈''' 1674년생. 영선공주의 남편, 삼성공을 대신해 조문사절을 간다.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대한 숙조의 황태자[br]{{{+1 효장태자 | 孝章太子}}}'''}}}}}} || ||<-2><#bf1400> '''[[작호|{{{#ffd800 작호}}}]]''' ||<(> 황태자 || ||<-2><#bf1400> '''[[시호|{{{#ffd800 시호}}}]]''' ||<(> 효장태자(孝章太子) || ||||<:><#bf1400> '''[[본관|{{{#ffd800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bf1400> '''[[휘|{{{#ffd800 휘}}}]]''' ||<(> 원(□) || ||||<:><#bf1400> '''{{{#ffd800 부황}}}''' ||<(> 숙조 건복제 || ||||<:><#bf1400> '''{{{#ffd800 모후}}}''' ||<(> 황후 양씨 || ||||<:><#bf1400> '''{{{#ffd800 부인}}}''' ||<(> 덕비 허씨 || ||<-2><#bf1400> '''[[묘소|{{{#ffd800 묘소}}}]]''' ||<(> □□원(□□園) || ||<-2><#bf1400> '''[[절일|{{{#ffd800 절일}}}]]''' ||<(> □□절(□□節) || ||<|3><:><#bf1400> '''{{{#ffd800 재위[br]기간}}}''' ||<-2><:><#bf1400> '''{{{#FFD400 대한 황태자}}}''' || ||<:> '''[[음력|{{{#ffd800 음력}}}]]''' || ?? ~ [[1697년]] [[4월 15일]] || ||<:> '''[[태양력|{{{#ffd800 양력}}}]]''' || ?? ~ [[1697년]] [[6월 3일]] || ||<-3><:><#bf1400> '''{{{#ffd800 생몰 기간}}}''' || ||<:> '''[[음력|{{{#ffd800 음력}}}]]''' ||<-2> [[1676년]] ~ [[1697년]] [[4월 15일]] || ||<:> '''[[태양력|{{{#ffd800 양력}}}]]''' ||<-2> [[1676년]] ~ [[1697년]] [[6월 3일]] || * '''효장태자 이원''' 건복제의 장남. 1676년생. 모후를 닮아 인자하고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 왕재가 충분하지만 아버지를 닮아 몸이 좋지 않은데, 을병대기근 때 미행을 나가지만 누구도 황태자라는 생각을 못하고 병든 [[난민]]으로만 생각할 정도다. 모범을 보이겠다며 [[단식]]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같은 이유로 치료조차 한동안 거부해서 1697년 6월 3일(음력 4월 15일) 동궁인 [[창경궁 낙선당|창덕궁 낙선당]]에서 훙서한다. 죽기 전 유언으로 숙부인 성친왕의 귀국을 요청하고 건복제가 이를 받아들여 재석이 귀국하게 된다. 자녀는 없었다. * '''덕비 허씨''' 황태자 이원의 부인. 건복제 초기에 내각승상을 지내고 물러난 곡성후 [[허적]][* 원역사에선 1680년에 사사(賜死) 당했다. 실제 생몰년으로도 타임라인이 얼추 맞고, 작중 조선의 정치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안정됐으니 더 오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의 손녀로 성품이 순하고 착하며 체구도 크고 건강하다고 한다. 조부의 배경뿐만 아니라 모친이 다산하였다[* 건강한 아들딸들을 무려 11명이나 낳았다고 한다.]는 점도 고려되어 황태자비가 되었다. 하지만 남편의 몸이 워낙 약해 결국 7년의 결혼생활 동안 자식을 낳아보지도 못하고 과부가 된다.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태자가 죽은 해 1월에 천주교에 귀의하고 태자 사후 매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후 덕비(德妃)라는 칭호를 받았다. 태황은 며느리를 안쓰러워해서 동궁에서 계속 지내게 해주었고, 엄동설한에 내보낼 수 없다며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는 성친왕도 일단 가태제로 책봉할 정도로 신경써주었다. 무인지변 후에는 자신이 동궁에 계속 있어서 성친왕 일가가 변을 당했다며 자책하고 스스로 동궁을 나가 친정으로 돌아간다. 1735년 이전, 시어머니 순현태후보다 먼저 훙서했다. * '''경흥공''' 1696년생 영해공의 삼남으로 5촌 당숙 효장태자의 봉사손으로 입적된다. * '''김 선시, 홍 숙녀''' 황태자 이원의 후궁들. 황태자비처럼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어버렸다. 허씨가 아직 동궁에서 지낼 때 셋이 함께 모여 기도했다는 걸 보아 이들도 같이 종교에 귀의한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